posted by 포스힐러 2012. 3. 3.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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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포장디자인 거장, 한국의 소주병 보고는…

[중앙일보]입력 2012.03.03 01:31 / 수정 2012.03.03 06:05

[j Global] 사사다 후미…아이디어는 경험치다, 젊다고 넘치지 않는다
일본의 대표 포장 디자인 업체 브라비스 인터내셔널 대표

 
상품은 머리보다는 가슴에 호소한다. 쇼핑에 나선 사람들은 한눈에 반한 것을 고르기 쉽다. 예뻐서, 익숙해서, 고급스러워서…. 일본 대표 패키지 디자인 업체 ‘브라비스 인터내셔널’의 사사다 후미(60) 대표는 이 점에 주목한다. 포장·용기 하나로 기업의 이미지가 결정되고, 그것이 곧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매출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패키지 디자인이야말로 기업에 있어 최고의 브랜드 자산이라는 얘기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를 충분히 확인했다고 했다. 지난 30여 년간 켈로그·닛산·로레알 등 글로벌 기업 외 농심(신라면)·동서식품(T.O.P커피)·하이트(맥스)의 패키지 디자인을 맡아왔다. 서울 논현동 브라비스 서울지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포장의 속얘기’를 들어봤다.

글=이도은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사사다 대표가 패키지 디자인과 인연을 맺은 건 34년 전이다. 세계 최대 브랜드 컨설팅기업인 미국 랜도 어소시에이츠에 디자이너로 입사했고, 이후 수석 디자이너와 일본지사 대표 등으로 18년간 일했다. 1996년 일본에 건너와 직접 회사를 설립했고, 현재 전 세계 6개국의 파트너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브랜드 제품 외에도 일본항공(JAL)과 나가노 올림픽 엠블럼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패키지 디자인이 일반 디자인과 뭐가 다른가.

 “패키지 디자인은 100% 상품을 팔기 위한 마케팅이다. 다른 산업 디자인처럼 디자인 자체를 놓고 ‘좋다. 나쁘다’를 평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패키지 디자인을 낚시에 비유한다. 낚시를 할 때 잡고 싶은 물고기에 맞춰 낚싯대·바늘·실을 정하지 않나. 패키지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어떤 고객에게 팔 것인가에 맞춰야 타깃에 맞게 잘 팔릴 수 있다.”

●패키지 디자인이 왜 중요한가.

 “사람들이 마트에 가기 전에 ‘세제를 사야지’ ‘우유를 사야지’라고 정하지만 무슨 브랜드를 살 것인가는 막상 매장에서 결정하는 때가 많다. 게다가 수많은 물건이 쌓인 진열대 앞에서 제품을 보는 시간은 0.2초에 불과하다. 제품을 들고 고민하는 시간도 20초 남짓이나 될까. 살 생각이 없는 제품까지 쇼핑 카트에 넣게 하려면 패키지 디자인이 경쟁력이다. 더구나 요즘 고객들은 패키지를 곧 브랜드처럼 기억한다.”

●CI(기업 이미지)를 대신한다는 얘긴가.

 “그럴 때가 많다. 흔히 기업의 가치를 알려주는 게 CI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건 기업 홈페이지에서나 볼까, 소비자들과 친밀하지는 않다. 하지만 패키지는 고객이 직접 접하는 제품이고, 서비스다. 특별한 색깔 하나, 무늬 하나만으로도 인상이 콱 박힌다. 그것이 바로 CI보다 강력한 브랜드 자산이다. 포장을 바꿀 때 모든 것을 바꾸려는 기업은 굉장히 위험하다.”

●그렇다면 성공적 패키지의 조건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해야 한다. 기업들은 가끔 패키지 하나에 글자도 큼지막하게, 색깔도 알록달록 튀게 등등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기억 속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패키지 디자인은 데커레이션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다. 제품의 핵심을 전달하지 못하면 브랜드의 자산이 될 수 없다.”

●예로 들만 한 것이 있나.

 “코카콜라와 포카리스웨트다. 코카콜라에 빨강과 로고가 없다면, 포카리스웨트에 파랑·흰색이 없다면 두 기업은 어떤 이미지로도 연상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장수 식품들은 시대에 맞춰 패키지를 바꾸더라도 고유의 컬러·무늬를 함부로 버려선 안 된다.”

●식품군에 패키지의 비중이 더 큰 것 같다.

 “고가품보다 아무래도 소비재가 많은 건 사실이다. 잘못 골랐다 해도 위험 부담이 덜하기 때문이다. 특히 식품군 중에서도 음료·주류 쪽에 비중이 크다. 맛이 비슷한 동종 제품이 다양해서다.”

 사사다 대표가 패키지 디자이너로서 인정받은 제품도 술이었다. 랜도 어소시에이츠에 입사해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하쿠쓰루’라는 일본 술의 라벨을 의뢰받았다. 병과 패키지에 모두 들어가는 디자인이었다. 신참이었지만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참여하게 됐는데 뜻밖에 선배들의 디자인을 제치고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첫 작품인 데다 남들 눈에 사소하게 지나치기 쉬운 라벨이 제품 이미지에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회고했다.

●패키지 디자인을 따로 공부했나.

 “75년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아트센터디자인대학(ACCD)에 진학했다. 원래는 그래픽 디자인을 배우려 했는데 전공이 패키지디자인과 아예 함께 개설돼 있었다. 생각한 바는 아니었지만 배워보니 매우 흥미로웠다.”

●경험상 패키지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뭘까.

 “내가 낸 책의 제목 이름이 바로 그 답이다.『CIKTMUPS(식트맙스)』다. Creative(창의력)·Idea(아이디어), Knowledge(지식)·Technique(테크닉)·Marketing Mind(마케팅 마인드)·Understanding(이해력)·Passion(열정)·Satisfaction(성취와 만족감)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너무 많다. 하나만 고른다면.

 “순서대로인 것 같다. 창의력과 아이디어다.”

●당신이 인정받은 비결도 그것인가.

 “어려운 질문이지만 맞는 것 같다. 나는 열다섯 때 미국에 유학 가서 서른한 살까지 살았다. 순수한 일본인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성장기에는 미국인처럼 생활했다. 그렇게 두 문화의 경계에 있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색다른 아이디어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고정관념을 깨는 디자인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경우는 없었나.

 “일본의 녹차는 늘 녹색이다. 당연한 선택이다. 그래도 나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서 흰색·노란색 패키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외면받았다. 결국 답은 초록 계열이면서도 조금 차별화되는 컬러를 내놓는 것이었다.”

●매번 아이디어를 어떻게 찾나.

 “아이디어는 젊다고 넘치는 게 아니다. 순전히 경험치다. 디자인 의뢰가 오고 나서 생각하면 이미 늦었다. 늘 머리 한쪽에 ‘저장고’를 두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아이디어가 나올 때는 순간적으로 번쩍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나 같은 경우는 잠에서 깨서 이불 밖으로 나오기 전에 많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항상 머리맡에 메모지와 펜을 둔다.”

 마트는 그에게 가장 소중한 ‘아이디어 창고’다. 그는 새로 나온 경쟁 상품을 마주쳤을 때 가장 긴장한다고 했다. 일단 무슨 브랜드인가 알아보고 직접 먹어보기도 한다. 디자이너로서 딱히 상관 있는 일은 아니지 않느냐 했더니 “얼굴 모르는 라이벌에게 지고 싶지 않다”라고 진지하게 답했다. 또 패키지 평가 말고도 내용물이 어떤지 파트너 기업에 조언을 할 때도 있다.

●마트 가면 직업병이 나타나겠다.

 “그런 게 있나 싶긴 한데 자주 가는 건 사실이다. 내 디자인과 상관없는 신제품이 나오더라도 주의 깊게 살펴보게 된다. 마트만이 아니라 종종 백화점 화장품 코너 같은 데도 꼼꼼히 둘러본다. 그런데 나이 든 남자가 자주 갈 곳은 아니라 주위 시선이 남다르긴 하더라. 길 가다가도 쿠키·케이크 전문점이 보이면 자연스럽게 들어갈 때가 많다.”

●직접 디자인한 제품을 볼 때도 있지 않나.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시판된 데뷔작이 샴푸·컨디셔너였다. 수퍼에서 보자마자 한 박스를 샀다. 가족· 친구들에게 기념으로 주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계산대에서 이상하게 쳐다봤다. 지금도 매장에 가면 내가 디자인한 제품을 진열대 앞으로 슬쩍 당겨 놓는다. 잘 보이게 정돈하기도 하고. 디자이너라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나(웃음).”

●직접 물건을 살 때도 패키지에 영향을 받나.

 “당연하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내가 디자인한 것에 손이 간다(웃음).”

●한국 제품 중에도 눈길 가는 패키지가 있나.

 “소주 디자인이 한국을 대변하는 것 같다. 전통과 문화가 응축됐다고 할까. 단아하면서 투명한 병 모양이 인상적이다. 일본 디자이너로서는 잡기 어려운 부분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패키지는.

 “달걀이다. 오묘하게 밸런스를 맞추면서 곡선이 아름답다. 신이 만든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패키지 디자인은 어떻게 변할까.

 “지금의 트렌드는 지속 가능한 친환경이다. 패키지 디자인도 여기에 영향을 받는다. 리필 제품이 많아지고 일회용 포장이 사라지는 식이다. 또 인터넷 쇼핑이 많아지면 패키지 디자인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 내게는 일종의 위기인데, 이런 시대에 맞춰 패키지 디자인을 변화시키는 게 과제다.”


j 칵테일 >> 은색과 타원형 라벨 붙인 ‘d’ …브랜드 대표하며 매출 급신장

사사다 대표는 스스로 성공적이라 꼽는 세 가지 패키지 디자인을 골랐다. 공통점은 모두 기존의 고정관념을 깼다는 것. 그가 “패키지 디자인에선 창의력과 아이디어가 가장 중요하다”고 언급했던 이유를 그대로 보여줬다.

d(하이트) -‘드라이’의 재해석

제품 특징은 드라이(Dry)한 맛으로 경쟁사와 차별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언어의 뉘앙스에서 답을 찾았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Dry’라는 단어는 ‘건조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반면, 일본에서는 ‘상쾌하고 깔끔한 맛’의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는 미각으로서의 ‘Dry’를 내세워 ‘d’라는 로고로 만들었다. 더불어 한국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타원형 병 라벨과 은색을 썼다. ‘d’는 판매 시작과 함께 매출이 급신장했고, 하이트의 핵심 브랜드로 성장했다.

노도고시(기린맥주) - 맥주잔 모양을 캔으로

맥주잔을 모티프로 삼았다. 캔 전체를 맥주잔으로 삼았고, 맥주잔에 마크가 인쇄되어 있는 것처럼 캔에도 찍었다. 그런데 막상 업체는 반대했다. 제품명과 디자인이 삐뚤어진 패키지는 잘 팔리지 않는다는 징크스 때문이었다. 기린 마크가 밑으로 향해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젊고 활기차 보이는 디자인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제품은 발매 후 넘버원 브랜드가 됐다. 맥주잔에서 넘치는 거품을 이미지화 한 디자인은 현재 여러 회사에서 모방할 정도다.

도쿄캄파넬라 - 참신한 브랜드 컬러

도쿄캄파넬라는 주로 전철역에서 파는 특산품 비스킷이다. 역이나 공항에서 시간적인 여유 없이 급하게 선택하는 물건이라는 점을 감안해 독창적인 브랜드 컬러를 도입했다. 흔히 경쟁 제품들이 노랑·빨강 등 난색 계열을 쓰는 것과 달리 에메랄드 블루라는 도회적인 컬러를 택해 구석에 놓여도 쉽게 눈길을 끌도록 했다.


WhatMattersMost?

●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동료’다. 가족을 포함해 선후배와 기업 파트너가 모두 내겐 동료다. 지금껏 많은 것을 이뤄왔지만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업을 하면서 돈도 벌고 이름도 얻지만 가장 나중에 남는 것은 결국 인간관계다.”



원문 :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771/7517771.html?ctg=1200&cloc=joongang|article|outside_home

이도은 기자

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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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포스힐러 2012. 2. 2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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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ZZ, 더블제트 건담, 쌍제트 건담.. 등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건담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건담으로 파워풀한 장비와 막강한 화력의 남자다운 마쵸맨 건담이랄까? 그런 느낌이어서 기체 자체도 매우 좋아했지만,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너무 마음에 들었었다.
지금까지의 우울한 느낌의 건담주인공들을 뒤로 쾌활한 주인공과 그들의 친구들을 보여주면서.. 건담도 이리 밝은 극전개가 가능하구나 하고 볼 수 있었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작품성이 좋다해도 우울한 이야기보단 작품성에서 혹평받아도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을 선호하다보니.. 이 ZZ건담은 필자에겐 궁합이 잘 맞는 애니메이션이었던것이다.
거기에 당시로서 한눈에 반한 루루카 라는 캐릭터... 시크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그녀에 한동안 빠졌기에.. 당시 애니메이션 잡지에 그녀 그림이 실리면 무조건 앞뒤안가리고 사곤 했었다.

일본에서는 건담시리즈중 혹평을 많이 받은 작품이지만.. 필자의 최고 건담은 바로 이 ZZ건담이다. 기체, 캐릭터, 극의 분위기 모두 좋다.
거기 나오는 오프닝곡 Silent voice 라는 곡... 처음 이곡을 들으며 건담 오프닝을 봤을때의 그 감격.. 필자는 기억한다.
그래서 이 노래 들으면 그때의 감격이 떠올라서 많이 좋아하는 곡이다.
추억에 잠겨보시길...

건담zz의  주캐릭터들.. 그들의 패션은 지금봐도 놀랍다. 주도와 엘의 스키니 바지, 루루카의 레깅스와 부츠.. 이걸 이시대에 미리 예측했다니... 앞서가는 패션센스.. 당시로서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필자가 좋아하는 그림중 하나다. 왜? 루루카가 있으니까... 조막만한 그림이라도 그녀 그림만 있다면 내겐 무조건 0순위로 모아야 하는 그림이었다. ㅋ

이 그림역시 좋아했다. 왜? 이유는 위에 밝혔다. 알아서 생각하시길.. ㅎㅎ

건담중 화력면에서 ZZ가 최강급이라는것이 바로 이 무기때문이다. 극중 거의 나오진 않는데... 실로 가공할 무기이다.
하이퍼메가입자포 인가...
슈퍼로봇대전이란 게임에서는 머리위의 저 조그마한 포대에서 발사되면 화면의 반을 날려버리는 괴력의 무기이다.
우주전함 야마토의 파동포 같은 느낌...

루루카... 말이 필요없다. 한때 나의 이상형이었다. 옷도 당시로선 파격적 스타일이었고.. 도도하면서도 때론 고양이같이 상대를 쥐락펴락 밀고 당기고 하는 모습이 참 매력이랄까..
요새는... 이런 스타일 여자...버겁다.. ㅎㅎ

머리를 한쪽으로 묶은 모습... 이 모습 역시 엄청나게 좋아했었다. 필자는 포니테일이 왜그리 좋은지 모르겠다. 걸을때 찰랑찰랑 한 모습만 봐도 매우 경쾌해지고 귀엽다. 좋아하는 여자가 포니테일까지 했으니... 뭘 바라겠나.. ㅋ

하만칸, 클레미, 플.. 그들도 이 애니메이션에 빠질수 없는 캐릭터들이다.

플... 적이었지만 주도가 좋아 무조건적으로 매달리고 따르는 아이... 이런 아이가 동생이라면.. 정말 잘해줄것 같다.

하만칸.. 역대 건담 악당중 가장 매력적인 악당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악당치곤 가지고 있는 스토리가 마음아프고..해서 미워할래야 미워할수 없는 캐릭터.. 거기다 예쁘다. 카리스마까지 있다. 루루카가 없었다면 하만을 좋아했을지도...ㅋ

이 깨는 그림은 대체 뭔가... 뉴타입지에 소개된 설정그림... 참으로... 말을 못잇게 하는 그림...


건담 BGM집 표지. silent voice도 이중 2번째 cd에서 발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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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포스힐러 2012. 2. 27.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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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 http://news.hankyung.com/201202/2012022607001.html?ch=news 

창업 오디세이…실패에서 배운다 - 김영삼 아이러브스쿨 창업자의 후회



아이러브스쿨이라는 기업이 있었다. 1999년 한국 최초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표방하며 1년 만에 500만명의 회원을 모았던 기업이다. 창업자 김영삼 씨(45·사진)는 당대 최고로 촉망받던 벤처기업가였다. 그랬던 그가 2001년 모든 것을 잃고 수십억원의 빚을 떠안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벤처기업 100개 중 성공하는 기업은 1개’라는 속설처럼 대부분 벤처는 성공보다는 실패의 길을 걸어간다. 세계 최초로 4D(4차원) 테마파크를 조성한 것으로 이름난 한 벤처기업인도 얼마전 비극적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실패의 기록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스마트·모바일 시대의 도래로 벤처 열풍이 다시 일고 정부까지 청년 취업난 해소를 이유로 창업을 독려하고 있지만 창업의 고단함과 위험성을 고지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신기루 같은 몇몇 성공 스토리에 묻혀버리기 일쑤다.

김영삼 아이러브스쿨 전 대표는 사업 실패 후 11년 만에 언론과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친구와 가정, 자존심과 명예까지 다 잃은 마당에 무슨 염치로 인터뷰를 하겠느냐”면서도 “다만 후배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 얘기는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창업은 필패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KAIST 경영정보공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그는 단돈 150만원으로 창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초·중·고교 동창들을 연결시켜 주는 신개념 서비스를 앞세워 아이러브스쿨을 세계 인터넷 사이트 3위에 올려 놓으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는 성공을 ‘관리’할 만한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은 게 문제였다고 토로했다. “자고 일어나면 회원이 몇만, 몇십만명씩 불어났어요. 그렇게 갑자기 다가온 성공에 취해 아무것도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어요.”

김 전 대표가 곤경에 처한 것은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다. 2001년 보유 지분을 금양에 넘긴 뒤 160억원에 달하는 주식 매각 대금을 받지 못한 것. 미납한 주식 양도세에 연체이자 등이 불어나면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업 실패의 표면적인 이유는 사기였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사람과 돈, 경영에 대한 명확한 철학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김 전 대표의 뼈저린 후회다. 회사가 갑자기 커져 운영자금과 새로운 인력을 수혈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차라리 회사를 팔아치우자는 유혹에 흔들린 것이 결정타였다는 설명이다.

“돌이켜보면 저는 천둥벌거숭이였어요. 경영이 뭔지 몰랐고 사람을 볼 줄도 몰랐어요. 그 대가는 너무 참담했습니다.”

◆ "자금 급해 과도한 지분 넘긴 게 실책"

김영삼 아이러브스쿨 창업자를 만난 곳은 서울 구로디지털단지 내 한 법무법인 사무실이었다. 그는 2001년 금양에 아이러브스쿨 지분을 매각한 뒤 대금을 받지 못해 10년이 넘는 법정싸움을 하고 있다. 금양 전 대표이사였던 정현철 씨를 상대로 주식매각대금 청구 소송 1심에서 승소했지만 아직 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원래 창업에 뜻이 있었습니까.

“KAIST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같은 연구실에 있는 사람들이 싸이월드를 만들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인맥은 학연이 최고인데 그걸 안 하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동료들과 150만원을 만들어 사업을 시작했죠.”

창업자금은 얼마나 들었습니까.

“창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 전화요금을 낼 돈이 없더군요. 마침 1999년 말에 금양이 찾아왔어요. 지분 40%를 줄테니 10억원만 투자해 달라고 했죠. ”

너무 많은 지분을 넘긴 것 아닌가요.

“돈이 급해서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죠. 저는 30% 남짓 되는 지분이 있었고 다른 창업자와 직원 등 우호지분을 합치면 60%가량 됐어요. 별 문제 없을 거라고 봤어요. 제가 너무 경영을 몰랐던 거죠.”

금양 투자 후에도 자금 문제가 계속 있었죠.

“금양이 투자하고 5개월 정도 지나 회원 25만명을 돌파했어요. 너무 빠른 속도로 늘어 추가 투자가 필요해 금양을 찾아갔는데 거절하더군요. 회원 수가 150만명을 넘어서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요. 그때 야후가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야후는 어떤 조건을 제시했나요.

“회원 수가 450만명 정도였는데 야후가 회사가치를 500억원으로 했죠. 그런데 그때 금양의 태도가 변했어요. 경영권을 보장하고 야후와 같은 기준으로 투자한다는 거였어요.”

야후가 아닌 금양을 택한 이유는.

“그때까지 제가 아이러브스쿨의 실질적인 최고경영자라고 생각했어요. 이미 대주주 금양이 회사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는데 너무 현실을 몰랐죠. 게다가 금양 전 대표가 아이러브스쿨을 다른 회사에 넘기고 해외로 나가면서 대금마저 못 받는 상황이 생겼어요. 정말 황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주식매각에 따른 세금은 부과되더군요. 이걸 못 내 신용불량자가 됐어요.”

벤처 창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성공에 대비하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명확한 비전과 실무지식도 갖춰놓아야 합니다. 그런 게 없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찾아오는 좋은 기회들을 다 놓칩니다.”

임원기/윤희은 기자 wonk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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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포스힐러 2012. 2. 26.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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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출처 : http://enews.mt.co.kr/2012/02/2012022410023152322.html?rnd=62802

박찬호(39)는 1994년 4월8일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화려하게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은 파격적인 메이저리그 직행이었다. 그러나 겨우 2경기 구원 등판 후 마이너리그로 떨어졌다. 이 때만 해도 그는 몇 달 이내에 메이저리그로 복귀할 것이라는 희망에 차 있었다.

메이저리그라는 '정글'은 냉정했다. 시즌이 끝나도록 토미 라소다 감독은 박찬호를 불러 올리지 않았고 1995시즌에도 마찬가지였다. 엔트리가 늘어나는 9월 승패가 의미가 없는 상황이 된 후에야 2경기 등판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다.

박찬호는 1994년과 1995년 메이저리그에서 각각 2경기에 나서 4이닝씩만 던졌다. 말 그대로 '눈물 젖은 햄버거'를 먹으면서 절망과 도전이 계속된 시기였다. 1994년 연봉은 메이저리그 최저인 10만9,000달러, 1995년은 11만4,000달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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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호가 사복 차림으로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이다. 메이저리그 데뷔 초창기의 그는 수수한 차림으로 다녔다.
박찬호가 자신의 시대를 열기 시작한 시기는 1996시즌이다. 10경기 선발 등판 포함 불펜을 오가면서 48경기에 출장해 5승5패 방어율 3.64를 기록했다. 투구 이닝도 108과 2/3 이닝이나 됐고 탈삼진은 이닝 수 보다 많은 119개였다.

시속 160km의 패스트볼을 구사하며 메이저리그 타자를 압도하는 박찬호를 보며 마침내 조국 한국의 팬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전 국민이 박찬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1996시즌 중 아무도 예상치 못한 논란이 벌어졌다. 일약 대스타가 되자 박찬호가 타는 차가 무엇인가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박찬호는 1995년 미국 진출 후 처음으로 승용차를 SUV로 구입했다. 새차도 아니고 중고차였는데 일본 차 메이커인 미츠비시사의 '몬테로'였다. 이 차를 놓고 마치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양분된 듯 극심한 논쟁이 계속됐다.

'왜 한국을 대표하는 박찬호가 일본 차를 타느냐. 안 된다. 바꾸라'는 측과 '그게 무슨 문제냐'는 주장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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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는 명 스포츠카 페라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페라리를 구입할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페라리를 사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오래전 LA 모터쇼에 전시된 페라리다.
에이전트였던 스티브 김의 사무실에도 쉴 새 없이 항의 전화가 왔다. 힘겹게 마이너리그 생활을 하던 박찬호는 마침 값싸고 괜찮게 보이는 중고 SUV가 나왔기에 구입해 구장을 오가고 LA에서 타고 다녔을 뿐인데 반일(反日) 감정을 가진 팬들의 비난과 압력을 받게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일본 차 메이커만 아니면 다른 것은 다 괜찮다'는 자세였다. 한국 차를 타야 한다고 고집하지도 않았다.

필자는 당시 박찬호가 차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지켜보며 '좋은 성적을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위로했다.

이 문제는 1997년 LA 다저스의 제5선발 자리를 차지하고 14승8패, 방어율 3.38을 기록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했다. LA의 거대 자동차 판매 회사에서 메르세데스 벤츠 2도어 스포츠 카를 무료 제공했기 때문이다. 일본차 논란은 이로써 완전히 종식됐다.

그러나 박찬호는 이후 한번도 일본 차를 구입하지 않았다. 자신이 미국에서 탄 첫 차여서 영구 보유하겠다고 생각했던 몬테로를 팔아버렸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기념관이 만들어지면 몬테로를 전시해 놓을 계획도 있었다.

그 후 박찬호는 BMW, 허머 등을 비롯해 한국 기아차의 오피러스, 스포티지, 그랜드 체로키 등과 메르세데스 벤츠 하이브리드 모델 등을 탔지만 일본 차와는 더 이상 인연을 맺지 않았다. 한국에서 반일 감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톱스타 김태희가 올 1월 출시된 한국 토요타의 뉴 캠리 모델에 발탁됐다. 뉴 캠리는 미국 켄터키공장에서 생산돼 한국으로 수입·판매되는 미국산 모델이다.
반면 '독도 수호천사'로 활동했던 모델 겸 탤런트인 한류(韓流) 스타 김태희(32)가 일본 내 극우보수주의자들의 반한(反韓) 감정에 곤욕을 치르고 있어 과거 박찬호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김태희는 21일 일본 도쿄에서 자신이 광고 모델을 맡은 일본 로토 제약의 화장품 발표회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행사 자체가 전격 취소되고 말았다.

일본 네티즌들이 '반일(反日) 여배우 김태희를 몰아내자'는 동영상까지 올려 놓자 행사 주최측은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안전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취소했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변화이다. 김태희는 한국에서 일본차 토요타 캠리의 광고 모델이다. TV에도 김태희가 캠리를 광고하는 것이 많이 나온다. 물론 한국에 수입되는 토요타 캠리는 일본제가 아니라 미국에서 생산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 박찬호 때처럼 일본차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반일 감정을 가진 한국인들도 김태희가 일본차 캠리 광고 모델을 한다고 해서 크게 비난하지 않고 있다.

반한(反韓) 감정이 심한 일본 내 극우보수주의자들도 모순이 있다.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에서는 김태희가 일본회사 토요타의 캠리 광고를 하고 있는데 토요타 측에 김태희를 광고 모델로 쓰지 말라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올시즌 롯데 출신 한국의 간판 타자 이대호가 오릭스 유니폼을 입고 일본 프로야구에 데뷔를 하게 되고, 야쿠르트의 임창용은 이미 일본 최고 마무리로 인정 받고 있다.

도쿄 신오쿠보 길에서 한국의 꿀 호떡을 200엔(약 2,800원)에 파는데 긴 줄이 서 있는 것을 보면 한류(韓流) 열기를 실감하게 된다.

비록 일부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계속되는 일본 내 반한(反韓) 감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곤혹스럽기만 하다.




장윤호는...
서울 중앙고등학교 시절 고교야구의 전성기를 구경했으나 그 때만 해도 인생의 절반을 야구와 함께 할 줄 몰랐다. 1987년 일간스포츠에 입사해 롯데와 태평양 취재를 시작으로 야구와의 동거가 직업이자 일상이 됐다. 한국프로야구 일본프로야구 취재를 거쳐 1997~2002년까지 6년 동안 미국특파원으로 박찬호의 활약과 메이저리그를 현장에서 취재하고 귀국한 후 일간스포츠 체육부장, 야구부장, 편집국장을 지냈다. 2003년 MBC ESPN에서 메이저리그 해설을 했고 2006년 봄 다시 미국으로 떠나 3년 동안 미 프로스포츠를 심층 취재하고 2009년 돌아왔다. 현재 국내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미디어 '스타뉴스(Starnews)' 대표, 대한야구협회 홍보이사, 야구발전연구원이사, 야구발전실행위원회 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06년 3월 '야구의 기술과 훈련(BASEBALL Skills & Drills)'을 번역 정리해 한국야구 100주년 특별 기획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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