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6.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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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출처 : http://enews.mt.co.kr/2012/02/2012022410023152322.html?rnd=62802
박찬호(39)는 1994년 4월8일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화려하게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은 파격적인 메이저리그 직행이었다. 그러나 겨우 2경기 구원 등판 후 마이너리그로 떨어졌다. 이 때만 해도 그는 몇 달 이내에 메이저리그로 복귀할 것이라는 희망에 차 있었다.
메이저리그라는 '정글'은 냉정했다. 시즌이 끝나도록 토미 라소다 감독은 박찬호를 불러 올리지 않았고 1995시즌에도 마찬가지였다. 엔트리가 늘어나는 9월 승패가 의미가 없는 상황이 된 후에야 2경기 등판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다.
박찬호는 1994년과 1995년 메이저리그에서 각각 2경기에 나서 4이닝씩만 던졌다. 말 그대로 '눈물 젖은 햄버거'를 먹으면서 절망과 도전이 계속된 시기였다. 1994년 연봉은 메이저리그 최저인 10만9,000달러, 1995년은 11만4,000달러를 받았다.
박찬호가 자신의 시대를 열기 시작한 시기는 1996시즌이다. 10경기 선발 등판 포함 불펜을 오가면서 48경기에 출장해 5승5패 방어율 3.64를 기록했다. 투구 이닝도 108과 2/3 이닝이나 됐고 탈삼진은 이닝 수 보다 많은 119개였다.
시속 160km의 패스트볼을 구사하며 메이저리그 타자를 압도하는 박찬호를 보며 마침내 조국 한국의 팬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전 국민이 박찬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1996시즌 중 아무도 예상치 못한 논란이 벌어졌다. 일약 대스타가 되자 박찬호가 타는 차가 무엇인가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박찬호는 1995년 미국 진출 후 처음으로 승용차를 SUV로 구입했다. 새차도 아니고 중고차였는데 일본 차 메이커인 미츠비시사의 '몬테로'였다. 이 차를 놓고 마치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양분된 듯 극심한 논쟁이 계속됐다.
'왜 한국을 대표하는 박찬호가 일본 차를 타느냐. 안 된다. 바꾸라'는 측과 '그게 무슨 문제냐'는 주장이 펼쳐졌다.
에이전트였던 스티브 김의 사무실에도 쉴 새 없이 항의 전화가 왔다. 힘겹게 마이너리그 생활을 하던 박찬호는 마침 값싸고 괜찮게 보이는 중고 SUV가 나왔기에 구입해 구장을 오가고 LA에서 타고 다녔을 뿐인데 반일(反日) 감정을 가진 팬들의 비난과 압력을 받게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일본 차 메이커만 아니면 다른 것은 다 괜찮다'는 자세였다. 한국 차를 타야 한다고 고집하지도 않았다.
필자는 당시 박찬호가 차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지켜보며 '좋은 성적을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위로했다.
이 문제는 1997년 LA 다저스의 제5선발 자리를 차지하고 14승8패, 방어율 3.38을 기록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했다. LA의 거대 자동차 판매 회사에서 메르세데스 벤츠 2도어 스포츠 카를 무료 제공했기 때문이다. 일본차 논란은 이로써 완전히 종식됐다.
그러나 박찬호는 이후 한번도 일본 차를 구입하지 않았다. 자신이 미국에서 탄 첫 차여서 영구 보유하겠다고 생각했던 몬테로를 팔아버렸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기념관이 만들어지면 몬테로를 전시해 놓을 계획도 있었다.
그 후 박찬호는 BMW, 허머 등을 비롯해 한국 기아차의 오피러스, 스포티지, 그랜드 체로키 등과 메르세데스 벤츠 하이브리드 모델 등을 탔지만 일본 차와는 더 이상 인연을 맺지 않았다. 한국에서 반일 감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반면 '독도 수호천사'로 활동했던 모델 겸 탤런트인 한류(韓流) 스타 김태희(32)가 일본 내 극우보수주의자들의 반한(反韓) 감정에 곤욕을 치르고 있어 과거 박찬호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김태희는 21일 일본 도쿄에서 자신이 광고 모델을 맡은 일본 로토 제약의 화장품 발표회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행사 자체가 전격 취소되고 말았다.
일본 네티즌들이 '반일(反日) 여배우 김태희를 몰아내자'는 동영상까지 올려 놓자 행사 주최측은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안전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취소했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변화이다. 김태희는 한국에서 일본차 토요타 캠리의 광고 모델이다. TV에도 김태희가 캠리를 광고하는 것이 많이 나온다. 물론 한국에 수입되는 토요타 캠리는 일본제가 아니라 미국에서 생산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 박찬호 때처럼 일본차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반일 감정을 가진 한국인들도 김태희가 일본차 캠리 광고 모델을 한다고 해서 크게 비난하지 않고 있다.
반한(反韓) 감정이 심한 일본 내 극우보수주의자들도 모순이 있다.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에서는 김태희가 일본회사 토요타의 캠리 광고를 하고 있는데 토요타 측에 김태희를 광고 모델로 쓰지 말라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올시즌 롯데 출신 한국의 간판 타자 이대호가 오릭스 유니폼을 입고 일본 프로야구에 데뷔를 하게 되고, 야쿠르트의 임창용은 이미 일본 최고 마무리로 인정 받고 있다.
도쿄 신오쿠보 길에서 한국의 꿀 호떡을 200엔(약 2,800원)에 파는데 긴 줄이 서 있는 것을 보면 한류(韓流) 열기를 실감하게 된다.
비록 일부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계속되는 일본 내 반한(反韓) 감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곤혹스럽기만 하다.
박찬호(39)는 1994년 4월8일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화려하게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은 파격적인 메이저리그 직행이었다. 그러나 겨우 2경기 구원 등판 후 마이너리그로 떨어졌다. 이 때만 해도 그는 몇 달 이내에 메이저리그로 복귀할 것이라는 희망에 차 있었다.
메이저리그라는 '정글'은 냉정했다. 시즌이 끝나도록 토미 라소다 감독은 박찬호를 불러 올리지 않았고 1995시즌에도 마찬가지였다. 엔트리가 늘어나는 9월 승패가 의미가 없는 상황이 된 후에야 2경기 등판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다.
박찬호는 1994년과 1995년 메이저리그에서 각각 2경기에 나서 4이닝씩만 던졌다. 말 그대로 '눈물 젖은 햄버거'를 먹으면서 절망과 도전이 계속된 시기였다. 1994년 연봉은 메이저리그 최저인 10만9,000달러, 1995년은 11만4,000달러를 받았다.
↑ 박찬호가 사복 차림으로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이다. 메이저리그 데뷔 초창기의 그는 수수한 차림으로 다녔다. |
시속 160km의 패스트볼을 구사하며 메이저리그 타자를 압도하는 박찬호를 보며 마침내 조국 한국의 팬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전 국민이 박찬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1996시즌 중 아무도 예상치 못한 논란이 벌어졌다. 일약 대스타가 되자 박찬호가 타는 차가 무엇인가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박찬호는 1995년 미국 진출 후 처음으로 승용차를 SUV로 구입했다. 새차도 아니고 중고차였는데 일본 차 메이커인 미츠비시사의 '몬테로'였다. 이 차를 놓고 마치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양분된 듯 극심한 논쟁이 계속됐다.
'왜 한국을 대표하는 박찬호가 일본 차를 타느냐. 안 된다. 바꾸라'는 측과 '그게 무슨 문제냐'는 주장이 펼쳐졌다.
↑박찬호는 명 스포츠카 페라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페라리를 구입할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페라리를 사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오래전 LA 모터쇼에 전시된 페라리다. |
흥미롭게도 그들은 '일본 차 메이커만 아니면 다른 것은 다 괜찮다'는 자세였다. 한국 차를 타야 한다고 고집하지도 않았다.
필자는 당시 박찬호가 차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지켜보며 '좋은 성적을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위로했다.
이 문제는 1997년 LA 다저스의 제5선발 자리를 차지하고 14승8패, 방어율 3.38을 기록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했다. LA의 거대 자동차 판매 회사에서 메르세데스 벤츠 2도어 스포츠 카를 무료 제공했기 때문이다. 일본차 논란은 이로써 완전히 종식됐다.
그러나 박찬호는 이후 한번도 일본 차를 구입하지 않았다. 자신이 미국에서 탄 첫 차여서 영구 보유하겠다고 생각했던 몬테로를 팔아버렸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기념관이 만들어지면 몬테로를 전시해 놓을 계획도 있었다.
그 후 박찬호는 BMW, 허머 등을 비롯해 한국 기아차의 오피러스, 스포티지, 그랜드 체로키 등과 메르세데스 벤츠 하이브리드 모델 등을 탔지만 일본 차와는 더 이상 인연을 맺지 않았다. 한국에서 반일 감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톱스타 김태희가 올 1월 출시된 한국 토요타의 뉴 캠리 모델에 발탁됐다. 뉴 캠리는 미국 켄터키공장에서 생산돼 한국으로 수입·판매되는 미국산 모델이다. |
김태희는 21일 일본 도쿄에서 자신이 광고 모델을 맡은 일본 로토 제약의 화장품 발표회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행사 자체가 전격 취소되고 말았다.
일본 네티즌들이 '반일(反日) 여배우 김태희를 몰아내자'는 동영상까지 올려 놓자 행사 주최측은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안전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취소했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변화이다. 김태희는 한국에서 일본차 토요타 캠리의 광고 모델이다. TV에도 김태희가 캠리를 광고하는 것이 많이 나온다. 물론 한국에 수입되는 토요타 캠리는 일본제가 아니라 미국에서 생산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 박찬호 때처럼 일본차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반일 감정을 가진 한국인들도 김태희가 일본차 캠리 광고 모델을 한다고 해서 크게 비난하지 않고 있다.
반한(反韓) 감정이 심한 일본 내 극우보수주의자들도 모순이 있다.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에서는 김태희가 일본회사 토요타의 캠리 광고를 하고 있는데 토요타 측에 김태희를 광고 모델로 쓰지 말라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올시즌 롯데 출신 한국의 간판 타자 이대호가 오릭스 유니폼을 입고 일본 프로야구에 데뷔를 하게 되고, 야쿠르트의 임창용은 이미 일본 최고 마무리로 인정 받고 있다.
도쿄 신오쿠보 길에서 한국의 꿀 호떡을 200엔(약 2,800원)에 파는데 긴 줄이 서 있는 것을 보면 한류(韓流) 열기를 실감하게 된다.
비록 일부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계속되는 일본 내 반한(反韓) 감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곤혹스럽기만 하다.
장윤호는... 서울 중앙고등학교 시절 고교야구의 전성기를 구경했으나 그 때만 해도 인생의 절반을 야구와 함께 할 줄 몰랐다. 1987년 일간스포츠에 입사해 롯데와 태평양 취재를 시작으로 야구와의 동거가 직업이자 일상이 됐다. 한국프로야구 일본프로야구 취재를 거쳐 1997~2002년까지 6년 동안 미국특파원으로 박찬호의 활약과 메이저리그를 현장에서 취재하고 귀국한 후 일간스포츠 체육부장, 야구부장, 편집국장을 지냈다. 2003년 MBC ESPN에서 메이저리그 해설을 했고 2006년 봄 다시 미국으로 떠나 3년 동안 미 프로스포츠를 심층 취재하고 2009년 돌아왔다. 현재 국내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미디어 '스타뉴스(Starnews)' 대표, 대한야구협회 홍보이사, 야구발전연구원이사, 야구발전실행위원회 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06년 3월 '야구의 기술과 훈련(BASEBALL Skills & Drills)'을 번역 정리해 한국야구 100주년 특별 기획으로 출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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